제주4.3사건 진압과정 중 초토화작전으로 불타고 복구되지 못한 마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잃어버린 마을이 4.3보고서에는 83개나 있다고 합니다. (130개라고 적고 있는 자료도 있습니다.)

초토화작전 당시 해안선에서 5km 이상의 중산간 마을들은 모두 소개되어 불타 사라졌는데, 4.3 진압 이 후 복구된 마을도 많지만 아예 복구되지 못한 마을도 많습니다. 다랑쉬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입니다.

 

위치

경도  126 : 49 : 42
위도  33 : 28 : 1

아름다운 다랑쉬오름(월랑봉) 탐방로 입구에서 서쪽으로 약 100m 지점에 있습니다. 제주 동부 오름과 해안의 아름다움을 조망할 수 있고, 화산의 신비를 간직한 다랑쉬오름은 이제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바로 인근에 용눈이오름이나 아부오름 등이 있어 이 인근을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습니다.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마을

제주 동부에서 가장 가파른 다랑쉬오름(월랑봉) 아래에 있던 마을로, 10여개 가호와 40여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모두 해안마을로 피신해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진] 인근 아부오름에서 바라 본 다랑쉬오름

 

 

이 마을터에는 입구에 나무로 된 비목이 서있습니다. 지금은 글씨가 많이 흐려져 사진으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다랑쉬마을’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이 작은 비목이 언제부터 여기에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전부터 이 곳에 서 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행히 이 비목만큼은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4.3관련 유적들이 우익단체들에 의해서 훼손되어 왔던 일들이 왕왕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곳에는 마을의 중심이였을 팽나무와 표석이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재도 이 주변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연못터 등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랑쉬굴

잃어버린 마을 중 ‘다랑쉬 마을’이 더 유명(?)하게 된 것은 마을자체 보다도 ‘다랑쉬 굴’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인근에 있는 ‘다랑쉬 굴’에서 1992년 4.3당시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11구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유족의 바램과 달리 그 유골들은 모두 화장되었고, 다랑쉬 굴의 입구는 큰 바위로 굳게 막혀 있어서 굴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게 현실입니다. 4.3이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이를 보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랑쉬 마을 표석 전문

잃어버린 마을 – 다랑쉬-

  여기는 1948년 11월 경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북제주군 구좌읍 다랑쉬 마을터이다. 다랑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마을의 북사면을 차지하고 앉아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다랑쉬오름(월랑봉, 높이 392m)의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하여 다랑쉬라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정겹다. 주민들은 산디(밭벼) 피, 메밀, 조 등을 일구거나 우마를 키우며 살았다. 소개되어 폐촌될 무렵 이 곳에는 10여 가호 40여 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지금도 팽나무를 중심으로 연못터가 여러 군데 남아 있고 집터 주변에는 대나무들이 무더기져 자라 당시 인가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이 마을은 1992년 4월 팽나무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다랑쉬 굴에서 11구의 시신이 발굴되면서 도민들에게 4.3의 아픔을 다시 한번 새겨주었다. 당시 시신 중에는 아이 1명과 여성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증언에 의하면 이들의 4.3의 참화를 피해 숨어 다니던 부근 해안마을 사람들로 1049년 12월 18일 희생되었다. 지금도 그들이 사용했던 솥, 항아리, 사발 등 생활도구들은 굴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1년 4월 3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상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신고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에도 얼마나 이데올로기에 빠져 4.3과 같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제가 바보였던 것일까요?

아래의사진을 가지고 다랑쉬 굴을 찾아 갔습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 정도 사진이면 찾을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 근처가면 작은 이정표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산산히 부서지고, 이정표는 커녕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3시간여를 가시나무에 찔리며 억새밭을 헤매었지만, 찾아 오는 것은 갈증과 밤의 어두움 뿐이였습니다.

 

 

다랑쉬굴 사건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 제2대대는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합니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치며 굴속에 수류탄을 던져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웁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질식해 죽게되고, 안에 있던 희생자는 11명이고, 이 중에는 여성 3명과 어린이 1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랑쉬굴은 1992년 세상에 알려집니다.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4.3취재반이 합동으로 현장조사를 하고, 1992년 4월 2일 첫 보도와 이 후 조사로 희생자의 신원과 유족, 사건의 전모가 밝혀집니다.

 

 
[사진] 발견당시 다랑쉬 굴 내부의 희생자 유골들

 

 
[사진] 사람들이 이 안에서 살았음을 보여주는 솥 등 생활용품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진] 지금은 이렇게 큰 바위로 굴 입구를 봉쇄해 버렸다.

 

끝나지 않은 4.3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뒤 유족과 도민 여론은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자”는 것이였으나, 얼마 후 행정,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인해 유골들을 화장하기로 결정됩니다. 결국 유해는 1992년 5월 15일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고, 다랑쉬굴은 큰 바위로 봉쇄되어 버립니다.

이 다랑쉬굴 내부에는 현재도 당시 사용했던 솥, 항아리 등 생활잡기들이 널려진 채 있다고 합니다. 굴 입구만이라도 찾아보고자 했으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4.3으로 그 실체조차 잊혀지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덧붙임

“제주 역사 기행” 책에 다랑쉬 굴을 도민의 기억속에서 지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현장 위치를 파악한 후 좀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위 내용 및 사진은 제주4.3평화공원 전시실에 전시된 것들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신고

잃어버린 마을은?

제주 4.3사건 진압과정 중 해안선에서 5km이상 들어간 마을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초토화작전’이 있었습니다. 중산간지역의 유격대에게 지원을 할 수 있다는 명분이였지만, 이로 인해 중산간지역 사람들은 무장세력과 무관하게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중산간마을이 불태워졌고, 또 많은 수의 마을들은 복구되지 못하고 영원히 잃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위치

평화로에서 동광방향으로 빠져나오면 동광육거리가 나옵니다. 이 중 S-Oil 주유소 옆길로 빠져서 1km정도 가면 있습니다.

다음 스카이뷰로 보기

위도 126 : 21 : 8

경도 33 : 18 : 25

 

무등이왓 표석

 

아래의 표석의 전문입니다.


  여기는 4.3사건의 와중인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터이다. 약 300년 전 관의 침탈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화전을 일궈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이래 4.3당시 동광리에는 무등이왓 이외에도 삼밭구석, 사장밭, 조수궤, 간장리의 5개 자연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주로 조, 메밀, 보리, 콩 등을 재배했고 교육열이 높아 일제 때에는 광선사숙과 2년제 동광간이학교가 세워졌다.

  4.3사건은 이 마을을 피해가지 않았다. 폐촌 후 주민들은 도너리오름 앞쪽의 큰넓궤에 숨어드는 것을 시작으로 눈덮인 벌판을 헤매다 유명을 달리했다. 한 할머니는 그 후 맷돌을 갈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다. “난 돼지집에서 숨언 살아수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허는 애기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아나수다” (난 돼지집에 숨어서 살았습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는 자식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아났습니다.) 4.3으로 무등이왓(130호)에서 약 100명, 삼밭구석(46호)에서 약 50명, 조수궤(6호)에서 6명이 희생됐다.

  인가가 자리했을 대숲을 지나 아이들이 뛰어 나올 듯한 올랫길을 걸어보라. 시신 없는 헛묘도 찾아보고 유일하게 복구된 간장리 마을을 지나 큰넓궤로 발길을 돌려보라. 평화를 기원하는 외침이 들려올 것이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 표석을 세운다.

사실은 조금 아쉽습니다. 이 표석의 내용만을 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마을 주민들이 희생되었던 이야기도 많이 줄여 쓴 점도 그렇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적당히 적어서 넘어 가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요?

 

짙은 5월의 푸르름

60년 전의 이 마을은 어땠을까요? 이처럼 푸른 하늘아래 보리가 익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4.3이 터졌지만 아직은 초토화작전이 시작되기 전이였으니, 마을사람들이 모여 보리를 수확하고 있었을 겁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닥칠지 알 수는 없지만, 익어가는 보리를 보며 희망을 안고 있었을 겁니다.

 

초토화작전

이전에도 여러 일들이 있었겠지만, 본격적인 탄압은 1948년 11월 15일부터입니다.

“해안선에서 5km이상 들어간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해안 마을로 내려와라.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폭도로 간주하겠다.”

초토화작전에 앞선 소개령이 당시의 상황에서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 상황에서 마을 유지 10명이 이유 없이 학살됩니다. 그 후 토벌대가 여러 차례 마을로 올라왔지만 피해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안마을로 내려간다고 해도 이미 ‘도피자 가족’이였기 때문에 산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던 와중 12월 12일, 잠복해 있던 토벌대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몰래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을 붙잡아 산 채로 화장시킨 학살극이 벌어 집니다.

이렇게 이 마을 주민들의 희생은 커져만 갑니다.

[사진] 대나무 숲이 이 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가도 가도 끝없을 것 같은 이 대나무 숲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를 새삼 일깨워 줍니다.

 

이 곳에 살던 주민들은 이 후로 더욱 힘겨워집니다. 인근에 ‘큰넓궤’라는 자연 동굴이 있습니다. 해안마을로 갈 수도 마을로 돌아올 수도 없었던 마을 사람들이 숨을 수 있는 피난처였습니다. 이 동굴에서 많을 때는 120여명이 60일 정도를 살았다고 합니다.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건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또다시 토벌대였습니다.

[사진] 분명 이 곳에는 집이 있었을 겁니다. 눈 앞에 그려지시는 지요? 초가집이 앞에서 보리를 타작하는 어른들과 주위를 뛰어 다니며 노는 아이들을…

 

토벌대에게 발각된 이상 큰넓궤에 머물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한 겨울 추위가 문제이긴 하지만 더 깊은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 눈위에 남는 발자국 때문에 토벌대에게 발각되기는 너무나 쉽게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1949년 1월에 토벌대에 잡혀 서귀포 정방폭포 등에서 죄없이 학살되고 맙니다.

[사진] 어느 집으로 통하는 올레(골목)이였을 겁니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초가집에서 누군가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아 주실 것 같습니다. 4.3이 우리 역사에 없었다면… 이 길의 운명도 달라 졌을 겁니다.

 

다른 곳이지만 시작된 이야기이니 조금 더 해볼까 합니다. 지금은 동양에서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로는 가장 높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서귀포 ‘정방폭포’가 4.3당시에는 최대의 학살터였습니다.

극단의 아름다움과 극단 폭력의 만남.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에는 이런 만남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밤에 정방폭포에 가지 말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었죠. 억울하게 죽은 혼이 너무 많은 곳이기에 그랬던 모양입니다.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이 곳 또한 극단의 아름다움과 극단 폭력이 만났던 현장인가 봅니다.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슬픈 역사를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글 내용 중 일부는 "제주역사기행"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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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까시 2009.05.17 23:31 신고

    제주도에서 그런 슬픈일이 있었군요..

    • k2man 2009.05.18 14:18 신고

      네..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없어야 되겠죠.
      사실 제주도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분들이 많지만, 이런한 역사 때문에 심리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1947 3월 1일, 제주시 관덕정 앞에서 수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3.1절 기념 집회가 열린다.

당시 시위로 오인한 미군정과 경찰은 매우 민감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말을 타고 가던 경찰이 넘어진 아이를 밟고 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분노한 시민들이 경찰에게 항의하자. 경찰의 발포가 시작된다. 이날 7명의 무고한 도민들이 희생되었다.

 

3.10 도민 총파업

 

이 사건에 대한 항의는 3.10 도민 총파업으로 이어진다. 당시 총파업은 제주도 민·관을 통틀어 95% 이상이 참여한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총파업이였다.

제주도청, 법원, 검찰 등 관공서, 운수회사, 통신기관, 금융기관, 학교 뿐만 아니라 일부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하였다.

 

레드 아일랜드, 레드 헌트

이에 대해 현지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미군대령은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하였다. 여기에 한 술 더떠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을 한다.

여기서부터 정부와 미군정은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지어 버린다.

이어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이 급파되었으며, 조병옥은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틀 새 200명이 연행되고 연행자에 대한 고문이 시작된다.

 

이 후 더 큰문제는 극우청년단 “서북청년단(서청)”이 들어온 것이다. 부족한 경찰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들어 오기 시작한 서청은 1948년 초 760명에 이른다. 이 들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을 장악하였고, “빨갱이 사냥(레드 헌트)”를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하고 4.3사건의 한 요인을 제공한다.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 부터 1948년 4월 3일 4.3 발발 직전 1년 동안 검속자가 무려 2,500명에 달했다.

더구나 1948년 3월 연행되었던 학생과 청년 등 3명이 고문치사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천지서, 모슬포지서, 그리고 서청에 의해서 죽어 갔다.

당시 고문치사로 희생된 분의 어머니는 이렇게 증언했다. (윤희춘 할머니, 작고하셨습니다.)

“둘째 아들도, 며느리도, 큰아들도 모두 내 눈앞에서 잡혀갔어.

모두 내 눈앞에서 잡혀갔어.

모두 걱정말라면서 떠나갔는데 아무도 안돌아와.

아직도 가슴이 가득해오면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너무나 억울해서 나는 몇 백 년이고 아들을 다시 보기 전에 죽을 수가 없어.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무장봉기의 시작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오름마다 봉화가 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임을 주장했다. 또한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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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도 미군정이 실시된다. 내려진 일장기 대신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올라간다.

미군 제59군정중대가 1945년 11월 9일 상륙하고 스타우트 소령이 제주도 도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 때 스타우트 군정관은 일제 시대에 일하던 경찰과 관리들을 재임용함으로써 민심을 자극하게 된다.

 

제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는 1945년 9월 22일 인민위원회로 재편성된다.

초기에는 미군정과 협력관계를 유지했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도민들이 직접 구성한 읍면리 단위까지의 도 전체 조직으로 성장하고 1947년 3월까지 공식 조직으로 활동한다.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간부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소문난 친일파만이 배제되었을 뿐 이데올로기가 아닌 하나로 뭉친 제주도를 대표할 만한 자치기구였다. 이로 인해 제주도민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더구나 중앙 인민위원회와 거리를 두어 독자성이 강했으며 강한 세력에 비해서 온건한 정책을 추구했다. 미군정과의 관계도 원만해서 전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활동을 했다.

이에 따라 각 마을에 학교가 세워지고 자치를 위한 준비를 해나가게 된다.

 

1947년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된다. 이는 기존 인민위원회와 대중정치단체를 총망라한 단체였다. 결성대회에는 당시 박경훈 제주도지사가 축사를 하는 등 제주도의 대연합이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체는 뜻하지 않게 3.1운동 기념행사에서 경찰의 발포를 맞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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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제주도는 일본군의 요새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서 1945년 3월 ‘결 7호 작전’에 따라 제주에 제58군 사령부를 창설하고, 정예부대였던 만주 관동군 2개 사단을 비롯한 한반도 내 병력을 모았다.

이렇게 모인 일본군이 7만명에 달했다. (당시 제주인구 22만명)

 

이렇게 제주도는 일본군의 요새로 바뀌게 된다.

모든 전략 요충지에는 강제노역으로 땅굴을 만들고, 비행장이 확장되고, 각종 방어진지가 구축된다.

[사진] 송악산에 배치된 대공포

 

[사진]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에 배치되었던 일본군 비행기

 

[사진] 모슬포에 배치된 무기들

 

다행히 미군은 제주도에 상륙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군의 패망으로 막을 내렸다. 아마도 당시 제주도에 미군이 상륙했다면 제주도는 오키나와와 같은 죽음의 섬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사진] 일본 패망 후 바다에 버려지는 일본군 무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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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제주에 봄은 오는가?

제주의 가장 잔인한 계절, 봄… 제주의 봄은 봄이 아니다.

제주도민들은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봄이 오는 것을 힘들어 한다. 자신의 가족, 친구의 할아버지, 삼촌… 제주도민 중 아픔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제주 4.3은 언제나 끝날 것인가?

4.3은 이념갈등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던, 한국 현대사의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10인 25,000 ~ 30,000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던 4.3은 언제야 끝나, 진정한 제주의 봄이 찾아 올까요?

 

제주 4.3사건은?

 

 

삼일절 발포사건과 총파업

1947년 삼일절,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발포하면서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하게되고, 이와 별도로 경찰발포에 항의하며 3월 10일 총파업이 벌어집니다. 이 총파업은 관공서와 기업 등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관합동 총파업이었습니다.

이 후, 미군정 조사단은 ‘경찰의 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으로 교체되고,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이 대거 제주로 들어와 주모자 검거작전에 나섭니다. 4.3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1048년 3월,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고, 한편으론 남로당 제주도당이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습니다. 초기 미군정은 경찰력과 서북청년단 증파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이 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명령을 내려 본격적인 군사작전이 시작됩니다.

 

평화협상의 무산

한편 9연대장 김익령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 4.28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 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의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무산되고 맙니다. 이 후, 평화적 해결을 원하던 김익령 9연대장은 교체되고 맙니다.

5월 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6월 18일에는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후 잠시 소강국면을 맞았으나,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 북한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4.3사건은 지역문제가 아닌 정권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여졌고, 이승만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합니다. 이 때 제주에 파견될 예정이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계엄령과 초토화작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에 앞서 송요찬 9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이 때부터 그 무시무시한 중산간마을 초토화작전이 시작됩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해안 마을로 소개당하고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며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다시 숨기 위해 한라산이나 동굴 등으로 몸을 피하는 주민들이 많아졌으나, 잡혀 사살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가족중 한명이라도 없는 경우, 그 가족을 모두 죽이는 학살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제주 4.3은 1947년 삼일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를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 해제까지 실로 7년 7개월간의 아픈 역사입니다.

 

위 글은 제주4.3연구소( http://www.jeju43.org )의 4.3개요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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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제주4.3사건이 일어난지 61주년이 되는 날이였습니다.

많은 유족과 도민들이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고, 4월 내내 도내 곳곳에서 4.3관련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61주기 4.3을 바라보며 몇 가지 느낌을 적어 보고자합니다.

4.3사건에 대해서야 이미 많은 글들이 있었으므로, 4.3진상보고서의내용으로 정리하겠습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밸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함.

 

제주도민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

제주도민들이 이제까지 원해왔던 것은 가해자였던 정부나 군, 서청 관계자의 처벌 등이 아니였습니다. 희생된 분들이 빨갱이라는 오명을 썻던 그 과거를 씻고 명예회복을 하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였습니다.

여기에 더불어 아직도 실종된 분들을 찾기 위한 발굴사업과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사업이였습니다.

그렇게 잔인하게 가족을 살해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처벌보다는 명예회복을 위해서 노력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제주4.3평화공원에는 민간인 희생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였던 군경까지 함께 추모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다 같은 피해자로 모셔져 있습니다.

 

피해자보상을 원하지도 않았다.

국민의 세금으로 피해자와 유족에게 보상을 해달라고 한 것도 없습니다. 단지 억울하게 총칼에 다쳐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치료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였습니다.

아직도 그 당시에 다친 몸의 상처 때문에 고통받고 진통제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집과 밭을 팔아 치료를 해야만 했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죽어졌으면 좋을 텐데, 죽어지지도 않는다고 눈물 흘리시는 분도 있습니다.

피해자와 유족 보상이 아니라, 최소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문제입니까?

 

내 부모가 어떻게 죽었다고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유족들의 가장 큰 슬픔은 4.3때 죽었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말이라도 잘못 꺼내는 날에는 빨갱이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단지 당시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고 언제 끌려가 죽을지 모른다는 의식이 뼛속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최근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었습니다.

1989년 첫 4.3마당극을 공연한 놀이패 ‘한라산’ 출연진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1995년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잠들지 않는 함성’ 제작자가 경찰에 긴급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레드헌트’라는 다큐멘터리 감독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이 분은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해외에 나가기전 구속되어 영화제참여를 못했음은 물론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1992년 다랑쉬굴에서 수습된 유족들은 유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덤을 만들지 못하도록 강제로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다랑쉬굴은 영원히 찾을 수 없도록 입구를 봉쇄해 버렸습니다.

 

제주도민이 어떤 피해를 주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우익단체의 행동을 보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해자가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합니다. 어찌보면 다 같은 피해자입니다.

이제는 서로 화해하고 정리해야할 역사임에도 다시 이데올로기 잣대를 꺼내들며 피해자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기고 있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제주도의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

제주도는 여전히 먼 변방의 나라입니다. 어제 9시 뉴스에서 4.3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던가요? 이와 관련된 전국방송의 어떠한 기획물이라도 있었나요?

제주도민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그냥 묻혀져버리길 바라는 것일까요?

블로거에 며칠간 열심히 글을 올렸습니다. 이제는 제주도의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로 알려졌으면 했습니다.

이제는 제주도민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함께 그 진실을 아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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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948년 4월 3일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마무리된 제주 4.3사건 발생 61주기입니다. 앞선 포스팅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주 4.3사건은 대부분 무고한 양민들이 3만명 가까이나 희생된 안타까운 현대사입니다.

사실 그 규모에서 본다면 한국판 킬링필드라고 불릴만할 정도입니다. 초토화작전으로 아예 불타 사라져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살지 않는 마을만 수십, 수백에 이를 정도입니다.

 

3만명이 희생됐다?

관련글 : 올해도 봄은 오는가? 제주 4.3 그 끝은?

제가 왜 피해규모를 3만명으로 소개했냐면, 4.3진상위원회에서 당시 피해에 대해서 신고를 받았습니다. 신고된 사망 및 실종자만 1만 5천이 넘었죠. 50년이 넘었는데도 이 정도라면 이미 숨진 목격자나 유족들을 추측할 때 더 많아진다는 결론입니다. 더욱이 앞서 말씀드린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자체가 몰살되어 유족조차 없는 경우도 많은 것도 이유입니다.

여기에 더욱 가슴아픈 이유는 함부로 4.3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가 잡혀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최근에도 4.3과 관련된 보고서를 만들었던 제민일보 기자라든지, 독립영화 감독 등도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조사를 받았을 정도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당시 미군이 작성했던 보고서에도 약 2만 8천여명으로 보고되고 있고, 80%정도가 진압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어떤 학자는 피해규모를 8만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관광서비스지역인 제주도는 여초지역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배웠던 내용입니다. 서비스업이 발달한 지역은 여성 인구가 많은 여초지역이다. 사회시간에 이렇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올해부터 제주도는 남초지역입니다. 남자인구가 더 많아졌죠. 제주도는 관광서비스업이 더욱 발달하고 있는데, 왜 여자가 아니라 남자 인구가 늘어났겠습니까?

결국 사회시간에 배운 내용이 잘못되었습니다. 제주도가 여초지역이 되었던 이유는 한국현대사에 있습니다.

일본의 강제징용, 한국전쟁과 더불어 남자를 몰살시켰던 4.3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구 30만의 제주도에서 남자 수만명을 죽였으니 (당시 여성 피해자도 많았습니다. 다만 남자 비율이 더 높았죠) 제주도에 남자가 일시적으로 크게 줄어버렸던 것입니다.

 

제주도는 변방의 땅

정확히 11년전, 평화공원이 생기기 전에 제주시 한라체육관에서 밤새 진행되 아침에야 끝난 본풀이 굿을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국내언론의 무관심에 놀랐었죠.

중앙에서 취재도 없을 뿐더러 제주권 방송에서만 잠시 촬영을 하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아침까지 남아서 끝까지 촬영을 하고 돌아간 방송사가 한군데 있었습니다. 그 방송사는 다름아닌 NHK였죠.

참 가슴이 아픕니다. 아픈 역사를 묻어버리라고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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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백비,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4.3백비 설명문 중에…]

 

 

 

전시실을 나서는 길에 4.3에 희생된 억울한 혼령들을 위로하는 글귀를 적어 붙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작은 소망을 적어 붙였다.

 

 

 

방사탑 – 제주에서는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사진과 같은 형태의 방사탑을 쌓았다. 실제 방사탑들은 사진과 달리 제주의 거친 현무암으로 쌓아 졌다.

제주시 신산공원에 4.3해원방사탑이 쌓아지고 화해와 상생을 의미하는 조형물이 되었다. 그 방사탑은 제주도민들이 하나씩 모아온 돌로 쌓여진 진정한 제주의 방사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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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억울함을 호소해도 이미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으리라 …

도민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였을까?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던 제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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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호등 2009.06.03 20:26 신고

    섬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 k2man 2009.06.04 12:06 신고

      섬과 육지는 공간적 특성 때문에 너무나 많은 차이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3일 4.3평화공원을 다녀왔습니다.

당시 촬영한 사진들을 늦었지만, 정리하고 공유하고자 합니다.

 

노대통령님 서거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4.3사건을 가지고도 좌우에서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지난 세월을 들춰내어 무엇하겠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듯이 화해와 상생은 진실을 규명하고 난 이후에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덮어 버리면 그 이면의 갈등은 영구적으로 치유될 수 없습니다.

화해와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진실을 규명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힘든 길을 거쳐야 합니다.

 

이번 포스팅은 1층 로비에 전시되어 있었던 4.3사진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라산 곳곳에서 발견되는 깨진 솥단지 등 생활용품 - 당시 이 척박한 산속에 많은 사람들이 숨어서 살아야 했음을 알 수 있다.

 

 

1992년 발견된 다랑쉬굴 내부 - 숨어 살기 위해서 이 곳 다랑쉬굴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서 모두 학살되었다. 발견된 유골은 유족에 대한 압력으로 모두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고, 굴 입구는 큰 바위로 막아서 폐쇄해 버렸다. 현재 이 다랑쉬굴 입구를 일반인이 찾기는 어렵다.

 

 

 

북촌 너븐숭이 애기무덤 - 1949년 1월 17일, 함덕 주둔 2연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리 주민들이 집단 학살되었던 곳으로 당시 최대 학살사건으로 꼽힌다. 제주에서는 어린 아이가 죽으면 묘를 쓰지 않는 전통이 있다. 수습되지 않았던 아이들을 묻은 작은 묘가 수십여기가 있다.

 

 

정방폭포 –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4.3당시 최대의 학살터였다. 폭포 위의 건물은 일제시대의 단추공장이다. 4.3당시 이 공장건물에 갇혀 있다가 폭포 위에서 학살되었다. 앞서 소개한 북촌리 사건과 비슷한 점은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없는 군인과 경찰들에게 학살을 하도록 해서 담력을 키울 수 있도록 했다는 진술이 있다.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터 – 이 곳은 일제시대의 비행장인 알뜨르비행장 인근에 위치한 탄약고터였다. 태평양전쟁말기 탄약고를 폭파시키면서 거대한 구멍이 생겼는데, 이 곳에서 수백명이 학살되었다.

수년동안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보니 시신이 모두 엉켜 있었다고 한다. 결국 시신은 인근 백조일손지묘에 함께 안장되는데, 이는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란 의미이다.

 

 

낙원동성 – 4.3당시 초토화작전(해안으로부터 5km이상 들어간 중산간지역 마을을 말그대로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거치면서 해안지역 마을에는 성을 쌓고 성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성을 쌓고 죽창을 들고 지켜야 했다. 현재는 남아 있는 곳이 얼마 없지만 해안 모든 마을에 성을 쌓았다고 한다.

 

 

비목 – 4.3당시 무장대에 의해 순직한 경찰의 비목, 모든 사람이 피해자이다.

 

 

농업학교 – 미군정, 제9연대, 제2연대 등이 주둔하던 곳이기도 하며 수용소의 역할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구금되어 있다가 학살되었다.

 

 

감찰청 – 제주경찰청의 전신인 제주경찰감찰청의 4.3당시의 모습, 문 밖으로 기관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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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gijm 2009.06.03 22:11 신고

    무조건 덮어버리는 것은, 용서도 아니고, 화해는 더더욱 아닙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내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하게 알면서도,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거나 화해를 청하지 않아도, 복수는 하늘이 해 줄 것을 믿고, 자기 자신은 상대방을 향해 웃어주고 안아주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하늘 아래서 가능하기나 하겠냐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지만, 그리고 실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저로서도, 매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용서로 바꿔야 하는 힘든 점이 있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골병 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골병 들게 됩니다. 화병이 나거나, 분에 못 이겨서 제 명에 못 살 거예요. 여하튼 용서라는 건, 그저 덮어두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화해라는 건, 상대방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할 때 가능하다는 것. 둘 다 사람에게 속한 것은 아닌 듯 한데, 그래도 사람으로 살면서 용서하거나 화해하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죽는데도, 후회는 없겠죠.

    • k2man 2009.06.04 12:04 신고

      말씀처럼 정말 사람이 진정성있는 용서와 화해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이 번 글은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있었던 위령제 이야기입니다.

 

대학교 새내기였던 1998년에 위령제를 찾았던 이 후로 11년만에야 위령제를 다시 찾았습니다.

당시에는 한라체육관에서 밤새 굿을 했었죠. 제주도 전통대로 심방(무당)이 나서서 진혼굿을 했습니다. 어찌보면 지금의 틀에 박힌 위령제보다 당시의 진혼굿을 밤새 하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밤 새 굿을 하며 혼령을 위로하고, 굿을 마치며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며 놀다가 음식을 나눠먹는…

진정 화해와 상생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웬지 위령제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위로한다기 보다는 행사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1998년 위령제에서 유일하게 밤새 모든 화면을 촬영해 간 방송사가 한 군데 있었습니다.

그 곳은 다름아닌 일본의 NHK였죠. 참… 아이러니 하지 않나요?

 

4월 3일의 제주4.3평화공원 - 2

 

 

사전 행사로 몇 가지 공연(?)이 있었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이 곳을 찾으셨습니다.

관계자들도 계시겠지만, 대부분 유족들이겠죠.

평일이라 아이들을 데려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제가 형식을 갖춘 위령제를 싫어하는 이유가 이런 모습 때문입니다.

가장 첫 식순이 이명박대통령의 헌화였죠.

사진은 의장대가 이명박대통령의 이름이 있는 화환을 옮겨 헌화하는 장면입니다.

 

유족분들은 얼마나 미울까요? 4.3진상을 자꾸만 깍아 내리는 현 정부를 얼마나 미워할까요?

그래도 차분히 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사진은 대통령 헌화에 이어 정부대표, 제주도지사 등이 헌화하는 장면입니다.

유족보다 이 분들의 헌화가 앞서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요?

 

이 놈의 권위주의는 …

 

 

해원과 진혼 …

아마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유족분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었겠죠.

 

 

묵념을 하라는 사회자의 말에 가던 길을 멈추시고 정성스레 묵념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후에 사진은 없습니다.

눈물 바다를 이루던 유족들의 헌화 장면은 다른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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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대통령님께서 서거하시고 돌이켜보니, 제주4.3사건이 전국적으로 인식을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노무현대통령님께서 마련해 주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3년 제주4.3진상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가 마무리되고 정식 보고서가 채택되었으며, 해당 연도에는 노무현 대통링께서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2006년에는 역대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제주4.3추모행사에 참석하셨습니다. (올해에는 대통령은 물론 4.3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총리 조차도 참석하지 않았죠.)

이번 글을 시작으로 제주4.3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고자 합니다.

 

4월 3일의 제주4.3평화공원 - 1

지난 2009년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이 날 희생자를 기리는 비석 제막식도 있었습니다. 공식 확인된 희생자의 성함과 지역, 당시 나이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날 4.3평화공원에서 수많은 유족들이 찾아와 당신들의 부모나 형제의 이름을 확인하고 추모하고 있었습니다.

 

 

5살도 되지 않는 영아는 물론 60세가 넘는 어르신, 여성 할 것 없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날은 제주도에서 가장 슬픈 날입니다.

어릴 때 돌아가셨는지 요구르트도 가져다 놓으셨습니다.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제단에 올려놓고 추모하시는 많은 분들이 계셨죠.

 

 

어디를 저렇게 보고 계실까요?

당신의 남편, 부모님이 돌아가셨을까요?

어찌 글도 모르시는 분들을 빨갱이로 몰아 갔을까요?

당시 미군 보고서에는 제주도민의 80% 이상이 빨갱이라고 했죠.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날 가슴 아픈 풍경이 곳곳에 이어졌습니다.

 

이명박정부들어 꾸준히 역사왜곡을 시도하고 있는 보수진영에 할말을 잃습니다.

 

정부에서도 기존 계획되었던 기념·추모사업을 축소하거나 취소시키고 있습니다.

4.3위원회도 통폐합을 시도하고 있죠.

 

보수진영에서는 다시금 제주도민과 당시 희생되신 분들을 빨갱이로 몰아가고 있고,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했던 사람들을 위인화 시키고 있습니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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